김소연_싸움터_종이에 과슈_28×21cm_2007.
교묘하다. 그를 감싸고 있는 것은 수많은 지식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을 가리켜 똑똑하다 일컷지만, 그건 사실 똑똑한게 아니다. '노가다'를 통해 얻음이 가능한 단편화된, 융해되지 못한 개념의 모음일 뿐이다.
분명 뛰어난 점이 있긴 있다. 상황에 대한 감각적 대처 능력. 하지만 그 대처 능력의 발현을 대할 때 느껴지는 맛은 좋다고 할 수 없다. 깔끔하지 못한 뒷 맛. 맛 뿐인가? 그 교묘함으로 인해, 무심코 그를 대하던 상대의 가슴에는 크게 상체기가 나고야 만다. 평소에 보이기만 했어도 무의식적으로나마 방비를 했을 터인데, 그는 상대방의 준비의 시간마저 빼앗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모습의 원인은 아마도 방향성에 기인할 것이다. 그리고 그 방향성의 잘못됨은 무지에 기인할 것이다. 무지 뿐 아니라, 이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나약함에 기인할 것이다. 그리고 그 나약함은 맛좋지 못한 어디엔가 기대고 있다는 뜻일게다.
에고... 블로그란 감정의 배출구던가? 지적 자만감을 맛보기 위한 거울인가? 묘하기 짝이 없다.
끊임없이, 강박적으로 반의존성, 좋게 이야기하자면 독립을 추구하는 나를 다른 면에서 바라보면 그만큼이나 나약하기 때문에, 그만큼이나 의존적이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고 그런 나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상태, 그 반대를 추구하는 나 자신에 대해 지쳐간다는 말이다. 아니, 또 모르겠다. 내 행동에 대한 반향을 해석해보면, 내가 아는 나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타인의 인식을 느낀다. 이러한 gap이 내게 그리 편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그러한 인식 상황을 만들어낸 것 역시 나 자신임에는 틀림이 없다.
얼마 전 무진장 똑똑해 보이는 듯한, 무진장 자유로운 듯한 한 신부님의 대담을 읽은 적이 있다. 천주교 신부임에도 '삼위일체는 허구'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입에 담는 이 신부님 왈, 그래도 '개인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불교보다 '유일신에게로의 의지'를 강조하는 그리스도교가 자신에게는 더 맞다고 하는데, 그 이유인 즉, 자신은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댐없는 자신 힘만으로, 개오를 통한 불교의 길은 그에게는 너무 어려운 길이라고.
어찌보면 이는 가장 솔찍한 자기 고백인 동시에 자신에 대한 통찰, 그리고 이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처법이 아닐 수 없겠다. 그 말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괜시리 진리 추구니 뭐니해서 강한 척하기 보다는 어쩌면 이데올로기에 불과할지 모르는 종교적 도그마 역시, 자신의 행복 추구를 위한, 쉽지 않은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게 너무도 현명한 처세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후... 언제인가, 실재에 접근하지 않은, 표면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은 글은 관념론에 불과한 배설밖에 되지 않는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요즘 내가 힘들긴 힘든가 보다.